오래간만에 KTX를 타고 시골을 내려갈 일이 있어 표를 끊다가, 우연히 시네마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내려가는 내내 지루함도 달랠겸 영화를 보기로 하고 '용서는 없다'라는 영화를 보게 됐습니다. '강우석제작, 설경구 주연'만으로도 충분히 기본이상은 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고 KTX 씨네마관으로 고고씽~~~광명시를 지나면서 차창에 커튼이 내려지고 이윽고...영화 '용서는 없다'가 시작되었습니다.
 

용서는 없다

△ 결국 '용서는 없다'도 설경구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영화?!


목적지에 거의
도착해서 영화가 끝나고, 커튼이 올려지면서 KTX내부가 환해졌는데요. 반대로 제 가슴은 답답해졌습니다. 왜 일까요? 김형준 감독의 말처럼 어찌할 수 없는 분노와 복수의 결말로 먹먹해진 걸까요. 영화 '용서는 없다'를 시나리오, 캐릭터, 장르의 정체성, 3가지 관점에서 기존영화와 비교해서 얘기를 해 보고, 영화가 끝나면 왜 가슴이 답답해지는 지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금강 하구둑에 어느 날 토막난 여자의 시신이 발견되고, 경찰은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환경운동가인 이성호(류승범)가 범인이라는 확증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확실 시 되었던 물증을 확보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 수사대는 할 수 없이 그를 놓아줄 수 밖에 없는데요. 게다가 시체 부검의인 강민호 박사(설경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사건에 깊숙히 연루되면서 스토리는 걷 잡을 수 없이 전개 됩니다. 여기에 초짜 형사인 민서영(한혜진)만이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데...

1. 시나리오 : 'A time to kill' vs '용서는 없다'

A time to kill, 1996

△ A time to kill, 1996 주인공인 사뮤엘잭슨이 폭도들에게 무참히 강간당한 딸을 안고 슬퍼하고 있다.


예술세계에 있어서도 모방을 통한 창작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영화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닌데요. 좋은 시나리오는 새롭게 각색을 할 수도 있고, 한 두번 개봉한 영화를 새로운 감독/배우들의 색 다른 형식이나 내용으로 리메이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방에 의한 새로운 창조는 오리지널 작품에 비해서 어떤 식으로든 발전된 형태로 보여져야 한다는 숙명적인 사명감 내지는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용서는 없다'를 보면 1996년 존그리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A time to kill'의 스토리라인을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한 흑인소녀가 술과 마약에 찌든 백인에 의해서 무참히 강간을 당하게 되고, 만신창이가 된 딸의 모습에 분노를 감당하지 못한 주인공 칼(사무엘 잭슨)은 그들의 판결현장에가서 총기를 난사, 개인적인 복수를 하게 됩니다. 이후 칼을변호하는 정의파 변호사 변호사 제이크(매튜 매커너히)와 이에 대응하여 등장한 냉정한 검사(케빈 스페이시)의 불꽃 튀는 법정 공방이 이어지게 됩니다.
 

△ A time to kill, 1996, 피도 눈물도 없는 버클리 검사로 분한 케빈스페이시


영화 '용서는 없다'에서는 주인공 이성호(류승범)가 타임투킬의 칼처럼 바로 응징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복수를 진행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만, 영화의 모티브인 차별적 신분에 의한 딸의 억울한 희생으로부터 복수가 전개된다는 점은 큰 흐름상에서 시나리오의 유사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시나리오의 유사성만으로 영화 '용서는 없다'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수 만은 없는 일입니다. 그 보다는 복수로 인해 발생한 분노의 공감, 분노를 풀어가는 방식에 있어서 얼마나 관객의 반응을 얻어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 타임투킬에서는 미국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이슈화하는 한편 유색인종과 그를 변호하는 백인 변호사가 KKK와 백인들의 테러 그리고 피도 눈물도 없는 버클리 검사의 거대한 파도와 같은 무차별적인 공격을 막아 내는 과정에서 순간 순간의 긴장과 갈등의 배치로 짜임새 있는 플롯과 함께 관객들의  감동과 공감을 함께 이끌어 냅니다.

반면, 영화 '용서는 없다'에서 주인공 이성호(류승범)의 누이는 재벌집 망나니들에 의해 무참하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설정은 아마도 감독이 이 시대의 뿌리 깊은 경제적 신분차이에 의한 법감정의 차별점을 부각시키려고 설정한 상황일 터일텐테 이를 풀어가는 과정 중에 양 극단의 신분상의 경쟁이나 갈등구도가 미약하고, 철저하게 부검의인 강민호 교수(설경구)에 대한 복수과정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분노의 공감 및 그로 인한 복수의 대리만족도 상당부분 반감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제기는 사회적 이슈를 다룰만한 큰 그릇을 만들어 놓고, 풀어 가는 과정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미시적인 개인의 복수극으로 흐르는 바람에 큰 그릇을 다 채우지 못하고 용두사미가 된 경향이 없지 않다는 것이죠. 그와 더불어서 극 초기에 이성호의 순수하리만큼 쉽게 내 뱉어버린 자백, 스릴러 무비이면 당연히 있어야 할 형사들의 헛다리 짚는 일 한 번도 없이 영화는 마치 분노와 복수로 마무리되는 결말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게 되는데요. 그러다보니 중간 중간 느껴야 할 최소한의 긴장감이나 반전조차 없이 오직 결과만을 위해 꿰어 맞춘듯 한 플롯에서 영화적 재미를 느끼기가 힘들게 됩니다.


2. 캐릭터 : 'Cape fear' vs '용서는 없다'

영화에 있어서, 특히 복수극에 있어서 복수를 진행하는 주인공의 캐릭터는 영화 전반을 지배할만큼 아주 중요합니다. 지금까지의 여러 복수영화의 캐릭터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복수극에 있어서 주인공의 치밀함과 혐오감, 그리고 집요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면 마틴스콜세지 감독의 1991년작 '케이프 피어'를 들 수 있습니다.

영화 케이프피어는 주인공 맥스 케이디(로버트 드니로)가 강간폭행죄로 14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오면서 시작되는데, 재판 받을 당시 의도적으로 무죄증거를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본인을 유죄로 몰고 간 공선변호사인 샘 고든(닉 놀테)의 복수를 진행하게 됩니다. 감옥에서 풍부한 인문과학 및 법률적 지식을 습득하고 치밀하게 준비해 온 맥스는 출감이후부터 서서히 샘을 복수하게 되는데요. 그 복수를 준비하는 치밀함과 로버트 드니로의 집요하고도 공포스러운 표정연기는 복수극에서의 관객들로하여금 무한의 분노를 이끌어 내고 깊은 감정몰입을 하게 합니다.
 

Cape fear

△ 'Cape fear', 1991년작, 사자갈기 같은 머리, 온몸에 문신을 한 로버트 드니로는 대사 없는 그 표정에서만도 무한한 집요함과 공포를 느끼게 합니다.


특히, 마지막 폭풍우 속에서의 혈투 끝에 바다 속에 가라앉는 로버트 드니로의 얼굴은 영원히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날 것 같은 복수의 화신처럼 소름끼치는 분노와 공포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에 반해 영화 '용서는 없다'에서의 주인공 이성호를 연기한 류승범의 캐릭터는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데요. 친환경 유기농 작물을 재배하는 환경운동가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데다가 극의 전개 과정에서 그의 연기는 너무도 차분하고 냉정합니다. 
물론 감독은 영화 '프라이멀 피어'에서의 애드워드 노튼 처럼 감정 변화 없는 내면으로 표현되는 복수의 캐릭터를 보여주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만약에 그런 의도였다면 주로 액션영화에서 선 굵은 연기를 보여주고, 정적인 연기 보다는 행동하는 다이나믹한 캐릭터로 자리매김한 류승범이라는 배우를 캐스팅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정말 류승범이라는 배우의 캐릭터를 살릴 의도가 있었다면, 차분하고 냉정한 캐릭터 보다는 영화 케이프피어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보여주었던 거칠면서 집요하고 다혈질적인, 철저하게 감정에 의해서 분노가 폭발하고 그러한 분노를 실질적인 행동이나 액션으로 보여주는 캐릭터가 기존 류승범이라는 배우에게는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3. 쟝르의 정체성 : '살인의 추억' vs '용서는 없다'

마지막으로 영화 '용서는 없다'에 흐르는 쟝르의 정체성이 헷갈립니다. 물론 장르라는 것이 편의상 카테고리를 규정해 놓아서 무 자르듯 갈라지지는 않습니다만, 설사 여러 장르를 퓨전형태로 표현하고자 했다면 각각의 장르별 장점을 조화롭게 소화해서  그 합이 시너지가 나도록 했어야 할 것입니다.

처음 영화 시작해서는 살인현장에서의 민서영 형사(한혜진)의 우왕좌왕하는 초짜 형사캐릭터에 더해서 기타 형사들의 걸쭉한 입담과 시골스러움이,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범죄현장에 등장하는 각종 캐릭터들의 우스꽝스러움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뭔가 살인현장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키치적인 유머코드가 아이러니하게도 적절하게 어울리는 그런 모습 말이죠.
 

△ '살인의 추억'

△ '살인의 추억', 영화 시작하자마자 이유 없이 미끄러지질 않나, 현장 보존도 엉성하기 짝이 없는 시골 형사들


그런데 극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이 두 영화는 아주 다른 길을 가게 되는데요.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는 연쇄살인이라는 전체적으로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송강호와 그 주변의 캐릭터들의 재미와 유머코드가 시의적절하게 배치돼서 자칫 우울하고 무겁게만 흐를 수 있는 영화를 즐거운 반전과 스토리라인의 강약 조절로 지루하지 않게 전개되도록 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화 '살인의 추억'은 장르적으로 보면 철저하게 범죄 미스터리 스릴러무비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반면 영화 '용서는 없다'에서의 전체적인 톤앤매너는 극이 흐름에 따라 캐릭터들의 연기와 유머코드들이 조화롭게 시너지가 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개인적인 애드립 정도로만 표현되어져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민서영형사는 초짜로서 말 그대로 좌충우돌 열심히 하는 캐릭터로써, 강민호박사는 시종일관 숨가쁜 분노와 억울함으로, 이성호는 차분함과 냉정함으로만 일관합니다.
물론, 캐릭터 자체가 그 성격을 대변하는 것은 맞지만 서로의 캐릭터를 연결시켜 주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윤활유 같은 톤앤매너가 부족함이 아쉽습니다. 일부 그 역할을 고참형사 윤종강으로 나오는 성지루씨가 하기는 했지만 그저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이었습니다.

용서는 없다

△ 극 중 성지루씨의 노련한 애드립 연기는 오히려 영화 전반에 자연스레 녹아들지 못해 안타까웠습니다.


이런 결과로 영화 '용서는 없다'는 어떤 장르의 영화인지 정체가 불 분명합니다. 철저하게 짜임새 있는 '세븐'같은 스릴러 공포물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경찰들 뒷 얘기를 다루는 가벼운 '투캅스'같은 Police movie는 더더욱 아니면서, 끈질긴 집요함과 거친액션을 보여주는 '케이프피어'같은 정통복수극도 아닌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영화 '용서는 없다'는 시나리오에서의 짜임새 부족, 캐릭터와 캐스팅의 부조화, 장르의 불분명함으로 인해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인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경구씨의 분노와 절박함으로 표현해 내는 열정적인 연기력과 간간이 관객들의 웃음보를 터뜨려 주는 성지루씨의 노련한 시골 형사의 입담들은 단순히 영화비 7,000원으로는 얻을 수 없는, 놓치기 아까운 소중한 볼거리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미지 출처 : 영화 '용서는없다' 홈페이지 및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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